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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영화 만든 한국의 해프닝족 스크린이 필요없는 영화만든다는 4명의 전위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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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profile_imageART 작성일 19-04-04 18:10 조회 1,20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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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이 필요없는 전위영화가 드디에 서울에도 나타났다. 이 영화에 대한 예술이냐 외설이냐 시비는 어리석은 대화다. 필름으로 조작되는 스토리 위주의 현영화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영상미를 모색하는 환경예술의 쇼킹한 깃발을 도전자없이 영화계에 꽂았다. 권대로운 사회에 새로운 것이 아니고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젊은 해프닝과 육란적인 에술선언은 과연 무엇인가?


영화아니라 시각예술

스크린도 보이지 않고 대사한마디도 들리지 않는 영화가 오브제에 투영된다. 오브제는 모델의 갖가지 모형과 종이로만든 납인형의 어지러운 형상들. 이 오브제의 하나하나가 스크린역활을 하는 작품이다. 그크린 대신 이물체에 필름의 영상이 투영된다. 

필름은 스크린에 비추는 것이 아니라 연극처럼 오브제로 형성된 무대에 비추어지게된다. 무대는 멜로드라마의 관객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전위적인 미술작품.

그러나 이젊은 헤프닝의 행동파들은 미술이니 영화니하는 말을 사용하길 싫어한다. 이름하여 시각예술이니 환경예술이니하고 즐겨 부른다.

이윽고 무대에 영화가 비추우지지만 스토리도 없도 대사도 없다. 단지, 강렬한 조명이 빞을 발하는 가운데 이따금씩 음악이나 효과가 나올 뿐이다.

숨어서 보는 도색영화처럼 8mm의 필름에는 권태로운 도시의 하나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은 아무런 할 일이 없다. 흘러가는 시간속에서 자신의 군태를 주체못한다. 옷을 하나씩 훌훌 벗는다. 알몸이 된다. 

여인은 발가락에 매니큐어를 바른다. 이 일이 끝나자 여인은 또 다시 할 일이 없어졌다. 권태에 육체를 딩굴어본다. 야릇한 쾌감속에서 더을 앞에 자기의 나체를 비쳐본다. 침대에 누워본다. 다들 오브제인이 여인과 아무런 상관없는 한남자가등장한다. 여인과 사내가 만난다. 사내를 만나기전 권태를 매우기 위해 자위행위를 하고났던 여인이 사내의 애무를 받는다. 

원와 현대를 비교하는 오브제 사이에서 애무를 한 두 인간에게 아무런 결말도 제시함 없이 영화는 싱겁게 끝난다. 

상영시간은 단20분. 영화라고 해서 「신」과 「신」이 연결된 것이 아니고 한 신 한신이 단절된 하나의 작품성격을 띤 흥타지.

스토리도 연결도 없는 이 영화는 권태로운 현대인의 존재를 시각적인 요소에 의해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걸로 만드는 사람들은 만족한다.

그러니까 보고 느끼고 결말을 짓는 것은 어디까지나 관객. 영화와 관객사이에 천태만상의 이미지가 전달되어진다.

종래의 영화와는 전연 다른 움직임을 보여준 이 전위 해프닝파들의 영화를 구태어 영화라고 이름 붙일 수는 없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 획기적인 한국 최초의 실험적인 영화는 실패작이란 이우로 발표를 보류, 새로운 실험영화를 다시 제작하고 있다.

실패작이라고 스스로 단정하고 공들여만든 jt 실험의 시도를 뭉겨버린 영화의 제목은 「문명·여자·돈」.

젊기 때문에 가증성이 있는 것은 뭐든지 해보겠다는 이들 전위의 기수들도 실패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는지 지금 진행중인 작품에 새로운 의욕을 쏟고있다.

이러한 전위 영화 운동은 작년에 해프닝쇼를 두 번이나 벌려 세상에 화제를 일으켰던 세명의 전위와가와 한명의 영화학도가 참가한 4인조 그룹에 의해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감독엔 김구림씨(34.화가),각본엔 최원영(28.한영대영화과졸업),오브제 미술에 정찬승씨(28.화가)와 정강자양(27.화가).

좁은 공간인 캠버스를 뛰쳐나온 이들 전위예술가들은 화살을 화단에서 마침내 영사기로 돌렸다.

인기스타의 얼굴에 질질 이끌려간 한국영화의 상업주의적인 경향에 정면으로 회의를 느낀데 실험영화를 만들게 된 직접적인 동기.

더욱이 예술은 창의가 생명인데 한국영화는 천편일률적인 모방영화라는 점에서 이들 해프닝파의 한국영화에 대한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진정한 의미의 예술적인 영상미란 「단순한 필름에서 보여주는데 아니라 입체적인 공간을 이용한 환경예술의 힘으로 제3의 영상미를 시도하는 것」

따라서 영화는 환경예술의 한 부분이지 영화자체만으로 예술이 성립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첫 번째 작품에서 실패한 이들은 지듬 진행중인 작품에는 시나리오의 기본형식을 그대로 따왔다. 25분간 상영될 이 영화는 시나리오의 형식대로 기승전결의 드라마가 있다/

이 점에서 전연 내용이 없는 첫 번째 작품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현대인의 기계화된 생활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인간의 부재를 내용으로 한 이번작품은, 제목은 구태여 붙일 필요가 없다는 의견에서 이름도 없는 영화가 되었다. 

일관된 스토리가 있는 이번 작품의 시나이로는 살펴보면,

①달리는 車內에서 본 고가도로 난간

②60개의 짧은 플래시 컷(flash cut)(1분)

③샤워(고속도 촬영)

④하품하는 남자

⑤피어오르는 연기

이런 내용이 전개, 갈등, 크라이시스, 클라이막스, 결말등 다섯 번 반복되지만 그때마다 카메라의 앵글이나 연출, 오브제가 달라진다.

그러다가 네 번째인 클라이막스에 가서 약간 달라지기도 한다.

①달리는 차내에서 본 고가도로 난간에 매달린 페인트통

②남자의 60개의 플래시 컷

③고장난 샤워

④거울에 자기를 응시한 남자

⑤피어오르는 연기


한국영화는 모방영화라며 반기

‘영화만으론 예술안된다’

현대영화에선 1분간에 한 인간이 웃고 울리는 2백40개의 플래시컷을 등장시킬 수 있지만 진행중인 작품에선 60개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상영때도 연출하며

단지 남자 한 사람만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현대인의 권태를 영상 속에 담아본 것. 현대는 아무리 큰 사건의 소용돌이로 엮어진다 해도 한 사람을 변화시킬만한 큰 사건이 없다는 주제다.

결국 현대는 인간을 변화시킬만한 큰 사건이 없다는 결론이지만, 이것은 관객이 느낄 뿐 영화는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전위영화의 가장 큰 성명은 영화를 상영해도 연출이 가해진다는 점이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일반 영화처럼 스크린에 비치는 필름만으로 완전히 영화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브제에 비쳐질 때 연출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연출은 필름이 비쳐지는 환경에 따라서 연출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필름이 비치는 오브제도 그저 평면적인 물체가 아니라 어떤 굴곡을 지니고 있는 생명감있는 무대다. 여기엔 영상만이 아니라 조명까지 등장한다.

한정된 스크린 속의 영상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오브제로 형성한 환경예술이므로 영화는 여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기성영화 전면 부정의 쇼킹한 영화이론이다. 

이런 이들의 노력은 외국에서도 드물다고 큰소리칠 정도로 이기적인 자만심에서 영화예술의 제3영상미를 모색하고있다. 이런 영화를 보고 관객이 영화를 만든 사람더러 미친사람이라고 욕을 해도 물론 관객이 느낄 수 있는 자유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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